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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인사이드

[서울시 도시갤러리프로젝트 ⑦] 삼청동길; 인사이드아웃사이드(Inside Outside)(上)

가치를 발견하며  서울시 도시갤러리프로젝트 삼청동길 인사이드 아웃사이드

 

 

공무도하(公無度河)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할 무렵의 조선(朝鮮)이라는 곳에 곽리자고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강가 나루터를 지키는 병사였다. 어느 날 아침 곽리자고가 여느 때처럼 강가에 나가 배를 정성껏 닦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저 멀리서 이쪽 강기슭으로 달려왔다. 그 남자는 눈동자의 초점이 풀려 미친 듯 보였고 모두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채 호리병을 허리에 매고 달려가는 그 사내는 말 그대로 백수광부(白首狂夫)였다. 곽리자고가 의아한 듯 사내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뒤를 쫓아 어떤 아낙이 소리를 지르며 남자를 말리는 듯 뛰어오고 있는데 그 아낙은 백수 광부의 아내였다. 아내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사내는 미친 듯이 강으로 뛰어 들어 물에 빠져 죽는데, 이내 강기슭에 도착한 아내는 크게 슬퍼하며 한탄을 금치 못한다. 몹시 슬퍼하던 아내는 공후라는 악기를 꺼내 비통한 노래를 부르다가 역시 백수 광부의 뒤를 쫓아 강으로 뛰어들어 죽고 만다. 여기서 등장하는 공후(箜篌)는 고대 동양과 중국에 전해지는 현악기의 일종이다. 모양도 서양의 현악기와 닮았고 그 유래도 서양에서 전래한 것이라고 하나 고대 문헌에 따르면 고대 고구려와 백제에 공후가 쓰였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온 곽리자고는 강에서 일어난 백수 광부 부부의 일을 아내 여옥에게 들려주었는데, 여옥이 이를 가사로 만들어 공후로 연주한 것이 공후인((箜篌引) 또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라고 전해지는 고대 악곡이다. 공무도하가에 담겨 전해 내려오는 슬픈 운명은 현대에 와서도 여러 사람에게 음악과 문학의 영감을 주었는데, 1995년 이상은이 발표한 <공무도하가>도 그 중 하나다. 키가 180cm에 가까운 그녀는 1988년 강변가요제에서 <담다디>라는 노래로 혜성같이 등장하고 나서 지금까지 모두 14개의 앨범을 내며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1995년 발표한 6집 앨범 <공무도하가>는 그녀의 음악적 성향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 중요한 앨범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노래의 모티브가 되었던 고대 악곡은 단 16자의 한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시 거기에 가사와 살을 붙여 4분 30초의 노래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강물에 휩쓸려 죽은 백수 광부와 그의 처의 슬픈 이야기는 강물에 실려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며 입에서 입으로 회자하곤 한다.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강물에 담긴, 강물이 전하는 얽히고 얽힌 여러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삼청동길


 

도미(都彌)와 아랑


고대 조선시대에서 강물을 따라 시간을 건너 지나다가,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신라가 힘겨루기하던 삼국시대에 잠시 멈추어보자. 삼국사기에 전해지는 이야기다. 백제의 네 번째 왕이었던 개루왕 때에 전해지는 설화가 있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이 천 년 전의 일이다. 배우 송일국의 열렬한 팬이었던 나처럼 몇 년 전 방영된 드라마 <주몽>을 보았다면, 비록 그 드라마는 다수의 허구가 섞여 있다고 해도 고구려의 기마민족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백제를 세웠다는 점은 사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말을 탈 수 있고 없는지는 계급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였는데, 북쪽에서 내려온 이들은 호쾌하게 말을 몰 수 있다는 이유로 지배 계급이 되어 예전부터 백제의 땅에 살고 있던 토착민들을 다스리게 된다. 그렇게 한강 주변에 살던 미천한 백제 백성 중 도미(都彌)라는 사내가 있었다. 그의 아내 아랑은 미모가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아랑의 행실이 올곧고 정갈하여 사람들은 그 미모보다도 높은 아랑의 절개를 칭찬하였다. 개루왕은 이 같은 도미와 아랑을 질투하여 도미를 불러 이렇게 말한다. “너의 아내 아랑이 비록 긍지가 높고 정조가 곧다고 하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좋은 말과 선물로 달래면 또 다른 마음을 갖지 않겠는가? 내가 너의 아내를 갖겠노라” 그 말을 들은 도미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아내가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더욱 질투심이 난 개루왕은 구실을 만들어 도미를 궁에 머물게 하고, 신하 한 사람을 왕으로 변장하게 하여 아랑에게 보낸다. 그리고는 도미와의 내기에서 이겼기에 아랑은 지금부터 궁으로 들어와 왕의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아랑은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짐작하였지만 겉으로는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이며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는 꾀를 내어 계집종 한 사람을 자신으로 변장케 하여 왕을 모시게 했다. 


그러나 늘 임시방편으로 짜낸 지혜는 오래가지 못했으니, 아랑의 눈부신 기지도 오래가지 못하고 개루왕에게 들통 나게 된다. 분노한 왕은 남편 도미의 두 눈을 파내 멀게 하고 조각배에 도미를 묶어 강물에 띄워 보낸 후 아랑을 궁으로 잡아들인다. 점점 구석으로 내몰리는 아랑은 마침 달거리를 하는 때라 몸이 깨끗하지 못하여 며칠 기다려 달라고 요청하고는 이슥한 밤을 틈타 탈출을 감행한다. 그리고는 사랑하는 남편 도미가 떠내려간 강에 이르러 통곡하는데, 정말 꿈결처럼 도미가 탔던 조각배가 울고 있는 아랑에게로 소리 없이 떠내려온다. 아랑은 홀리듯 그 조각배가 이끄는 대로 강물을 헤아려 나가는데 과연 그 끝에 두 눈이 멀어있는 도미를 다시 만나게 된다. 결국, 도미설화는 이 부부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에서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눈이 먼 남편 도미와 스스로 아름다움을 비관하여 갈댓잎으로 얼굴을 긁어 못나게 만든 아내 아랑의 슬픈 삶과 죽음의 이야기는 강물을 따라 오늘날에까지 전해지는데, 여전히 이 둘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며 슬픔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백수 광부와 도미의 슬픈 전설을 들으며 나는 지금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 어귀에서 강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정선 아우라지는 구절리에서 흐르는 송천과 삼척 중봉산에서 흘러오는 골지천이 하나로 아우러지는 구간인데 슬픈 가락으로 유명한 정선 아리랑이 태어난 이곳에도 이 강물에 얽힌 슬픈 사연이 있다. 아우라지를 사이에 두고 양 기슭 마을에 사랑하는 처녀와 총각이 각각 살고 있었는데 그 둘은 이웃 싸리골로 동백을 따러 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밤새 폭우가 퍼부어 강물이 불어났고 나룻배가 뜰 수 없게 되자 서로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노래가 되어 전해졌다고 한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사철 임 그리워 나는 못살겠네.” 그런데 구전 노래라는 것은 그 기원이 저마다 달라서, 좀 더 슬픈 사연도 전해져온다. 이곳 아우라지에서 행복한 미래를 약속한 젊은 남녀가 있었는데 장성한 남자가 과거를 보기 위해 뗏목을 타고 한양으로 떠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남자는 감감무소식이라 애가 타는 처자가 매일 강기슭에 나와 한양으로 떠난 임이 언제 돌아오는지 애가 타게 기다렸다는 것이다. 오늘날 아우라지에 가보면 싸리골로 동백을 따러 가려던 처자인지 아니면 한양으로 떠난 낭군을 그리워하는 처자인지 모르겠으나 그 여인을 본떠 만든 동상이 강기슭 한 편에 세워져 있다.


슬프고 애잔한 사연을 뒤로하고 이곳 아우라지에서 합쳐진 강물은 영월로 흘러간 뒤 남한강 상류의 큰 줄기에 합류하게 된다. 남한강에서 단양과 충주를 거쳐 양수리 두물머리로 접어들면 이윽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한데서 만나게 된다. 이렇게 모인 북과 남의 강물은 더 거대한 물줄기가 되어 한강으로 흘러드는데, 정선 아우라지에서 이렇게 한양으로 가는 강물은 그 길이를 쉽게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굽이굽이 굽어 있다. 

 

삼성동길

 

지도를 통해 정선에서부터 시작하는 그 물줄기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따라가 보면 직선으로는 더 빠르게 닿을 수 있는 거리를 마치 일부러 돌아가듯 요동치며 부딪혀 멈추기도 하고, 가끔 막다른 곳에 다다라 되돌아오기도 해야 하고, 지세가 험한 오르막도 있고, 또 갑자기 뚝 떨어지는 가파른 내리막도 있고, 그 너머를 알 수 없이 높게 솟아오른 바위에 퉁겨져 나오기도 하고,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높은 언덕에도 오르고...... 이처럼 굴곡을 온몸으로 토해내며 강물은 비로소 그 목적지까지 간다. 강물은 절대 직선으로 흐르지 않기 때문에 때로 빠르고 느리며 흐름을 쥐었다 폈다 한다. 그렇게 곳곳을 누비며 지나가기 때문에 세상 곳곳의 이야기가 모여들고 또 그렇게 모여든 이야기들이 또 다른 전설과 사연과 소문을 만들어낸다. 시원하게 곧게 나 있는 고속도로는 이런 이야기를 담을 수 없다. 강물 이외의 길들은 이야기를 담아두기엔 빠르고 똑바로 흘러가고 있고, 이야기를 만들어내기엔 그곳으로 흘러드는 것이 없는 이유다. 그래서 강물은 안과 밖의 경계가 없이 그것이 고대 때부터 전해지던 작자 미상의 설화이든, 혹은 가사 없는 노래든, 수백의 이야기로 변형되는 사연이든 상관하지 않고 모든 이야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공무도하가도, 도미 설화도, 정선 아우라지의 애잔한 처자의 이야기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비사도, 양수리 두물머리에 가득 울려 퍼지는 통기타 소리도, 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나일 강에 버려진 오시리스도, 강물에 떠내려가는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리라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한데 섞인다. 그리고 다시 여기저기 부딪치며 유유히 흘러갈 것이다.


그래서 가수 안치환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를 부르며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답다고 했던 이유도, 여기저기 부딪히고 시련을 겪지만 결국 유유히 계속 흘러감을 말하기 때문이었다. 유유히 흘러간다는 것은 너와 나의 무의미한 구분이 없고 안과 밖의 구분을 두지 않고 어제와 오늘의 구분을 굳이 말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강물 같은 공간은 어떤 곳일까? 전통과 현대가 함께 공존하지만, 이곳이 그 둘 중 어느 한 모습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공간, 다채로운 문화와 경험들이 함께 어우러져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새로 만들어내는 공간, 많은 것들이 들어오고 한데 섞이지만, 또다시 다른 곳으로 흘러나감을 억지로 막지 않는 공간, 그런 공간이 강물 같은 공간이다. 그곳은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의 주 무대인 중간지대와 같다. 중간지대에서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난 엘프, 온갖 감정의 화신인 인간, 외모 대신 손재주를 선물 받은 드워프, 그리고 오크와 고블린들이 한 무대에서 어우러지며 시간과 장소는 잠시 잊어둔 채 다양한 가치와 주제와 이야기가 합쳐졌고 가장 흥미로운 전설이 바로 그 중간지대에서 쓰였다. 그리고 이제 시간을 지금으로 맞추어 우리는 삼청동을 생각하려 한다.



만해한용운심우장


삼청동으로 향하기에 앞서 먼저 성북구에 있는 심우장에 들려보자. 심우장은 어떤 공간이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이처럼 유유하게 흘러갈 수 있음을 처음 깨달은 곳이었다. 대학 2학년 때의 일이었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었지만, 국문학과에 관심이 많아서 틈틈이 수업도 수강하여 듣고 청강도 하며 책에서만 보던 교수님들의 수업을 듣곤 했는데, 평론가로 유명하신 국문학과 최동호 교수님의 <현대시와 선시> 수업을 듣던 2005년 봄이었다. 교수님이 강의실에 오시더니 다음 시간에는 교실에서 수업하지 않고 밖에서 현장 수업을 하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교실을 벗어난다는 생각에 손뼉을 치며 환호했는데 교수님이 알려준 장소는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이란 곳이었다. 그때까지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곳이었는데도 각자 알아서 찾아오라고 하신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학교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성북동 사무소에서 내리니 저 멀리 골목 어귀에 간송미술관이 보인다. <성북동 비둘기>가 절로 떠오를 정도로 그날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몹시 궂은 날씨였고 하늘은 잿빛이었다. 스마트폰도 없어 여기가 맞나 두리번거리며 길고 긴 골목길을 따라 걸어간 끝에 계단이 좁게 나 있었는데 그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니 작은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심우장, 정확한 이름은 만해한용운심우장(萬海韓龍雲尋牛莊)인 이곳은 한용운 선생이 일제 총독부가 보기 싫어 남향이 아닌 북쪽을 향해 지었다는 작은 집이다. 한용운 선생은 추운 겨울날 이곳에서 눈 덮인 마당을 쓸다가 타계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성북동에 이런 공간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교수님과 우리는 심우장을 한 바퀴 돌고 난 뒤 제법 넓은 마당에서 이곳의 의미를 되새기며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둘러보니 교수님 눈도장만 찍고 몰래 간 친구들도 있었으니 남은 사람들은 이십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심우장 옆에 놓인 작은 집에서 사람이 나오며 우릴 향해 인사한다. 알고 보니 그 집에서 기거하며 심우장을 관리하고 청소하고 때로 이렇게 손님이 왔을 때 맞아주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교수님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 개의치 않으셨지만, 나를 비롯한 적지 않은 학생들은 모두 놀라고 말았다. 일본강점기 때의 역사적 공간이라고 생각한 이곳에서 현대 시간의 또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에, 그리고 그 사람을 보았다는 것이 당시는 퍽 생소한 경험이었다. 나와 다른 학생들의 마음속에는 공통의 질문이 피어났다, 여기는 방문객이 오고 가는 관광지인가? 아니면 사람이 사는 거주지인가? 하나의 장소에 여러 개의 의미와 이야기가 섞인 공간은, 늘 그와 같은 물음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뒤 간송미술관을 찾는 날이면 조금 더 시간을 내어 심우장을 둘러보고 오게 되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처음 가졌던 질문에 조금씩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성북동도 시간이 지나며 많이 변했던 것이다. 콘크리트 더미로 여지던 성북동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오래된 공간이 많았고 또 그 오래됨을 발견한 만큼 새로운 현대 문물이 여기저기 들어섰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시간을 쪼갰을 때 보이는 어느 한순간만의 모습이 이 공간의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을 거듭해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사람들과 문화가 합쳐지고 또 체로 걸러내고 남은 것이 이 공간과 내가 나누는 대화가 된다. 나는 그 같은 공간과의 대화가 참으로 유유하게 그리고 새롭게 느껴졌다.






황정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