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라이프 인사이드

[서울시 도시갤러리프로젝트 ⑤] 동십자각 지하보도; 지하도(地下圖) (上)

 

 


엄마, 그리고 우리 엄마


내가 기억하는 우리 엄마는 손재주가 많은 분이었다. 어릴 적 나는 레고를 갖고 노는 걸 참 좋아했다. 명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기념일에는 꼭 레고를 선물로 받았는데, 중세시대 성에서 말을 타고 다니는 검은 망토의 기사 바다를 누비는 해적선의 외눈 후크 선장, 저 멀리 아마존에 있는 부족장, 달나라로 가는 우주항공선 선장은 모두 내 친구들이었다. 레고가 사실 쉬운 편은 아니었다. 지금도 복잡한 레고 제품은 설명서를 들여다보아도 조립하기가 참 만만치 않은데 그때는 오죽했을까, 설명서를 아무리 낑낑대고 들여다보아도 이 블록을 어디에다가 어떻게 놓아야 할지 막막했고, 또 이게 설명서에 나와 있는 그 블록인지조차 헷갈릴 때가 많았다. 그런 힘겨운 고민의 시간을 겪고 나서 마침내 설명서 그림에 나온 대로 완성품이 탄생할 때의 희열은 참으로 대단했다. 물론 완전하게 조립했다고 생각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보면 늘 한 두 블록들이 남아 있었고, 또 투덜거리며 내가 그 블록들을 어디에 넣어야 할지 한참 고민하곤 했다. 나는 그렇게 레고를 조립하며 참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래서 나는 레고가 어린이들의 손재주를 발달시키고 또 창의력을 증진시켜 두뇌 회전에 도움이 된다는 그들의 광고 문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다 가끔 아무리 끙끙대며 고민해도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나는 엄마한테 레고 통을 통째로 들고 갔다. 그러면 엄마는 꼭 다른 일을 하던 중이었음에도 뚝딱뚝딱 조립해주었다. 전화를 하며 전화기를 턱에 괴고는 입으로는 열심히 말을 하면서도 손으로는 내가 아무리 해도 완성하지 못한 조립을 탁 끝낼 때는 절로 내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엄마가 참 멋있었다. 사실 그런 경험이 어디 레고 뿐일까, 손재주 많은 엄마는 회화에도 관심이 많아 가끔 집에 이젤을 세워두고 어디선가 찍어온 풍경 사진을 이젤 한 켠에 붙여놓고는 의자에 앉아 유화를 그리곤 했다. 엄마는 아마 기억하지 못할 거다. 환한 빛이 들어오는 우리 집 배란다에 이젤을 세워두고 그림을 그릴 때 내가 그 뒤에서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비록 검은 실루엣으로 가득했지만 언제나 무엇이든 내가 못하는 걸 척척 해내는 엄마가 나는 참 멋있게 느껴졌다.


그런 엄마와 나의 관계가 역전되기 시작한 건 내 머리가 조금씩 굵어지고 우리 삶 속에 컴퓨터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많은 부모님들이 그렇지만 컴퓨터는 그들에게 참 낯선 도구였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어지간히 말을 안 듣고 게임과 통신 채팅에만 빠져있던 나를 보며, 엄마는 아마 컴퓨터가 그런 용도로만 쓰이는 애물단지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던 것 같다. 컴퓨터로 이 메일도 보낼 수 있고, 여러 가지 문서도 만들 수 있고, 카메라로 찍은 사진도 볼 수 있고, 뉴스도 읽을 수 있고, 컴퓨터로 점점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나는 엄마와의 대화가 점점 줄어들었고, 어릴 적 그처럼 멋지게 보였던 엄마는 이제 컴퓨터를 잘 다룰 줄 몰라 나와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고 달리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엄마는 몇 년 전부터 나에게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컴퓨터를 가르쳐 달라고 계속 말하기 시작했다. 서점에서 책을 사서 공부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나는 말했지만, 엄마는 가끔 생각날 때마다 이것저것 나한테 물어보며 조금씩 컴퓨터를 접할 뿐이었다. 당연히 엄마는 바로 며칠 전에 가르쳐준 것도 잊어버리기 마련이었고, 나는 그때마다 답답한 마음에 어떻게 이렇게 간단한 것도 모르냐며 큰소리를 치곤 했다. 그러나 컴퓨터를 가르쳐 달라는 엄마의 부탁 아닌 부탁은 그런 나의 큰소리에도 계속 되었다.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가 외할머니 댁에 다녀오더니 거실에서 아빠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걸 듣게 되었다. 엄마가 얼마 전 외할머니 댁에 전기밥솥을 하나 장만 해 드렸는데 할머니께서 사용법을 제대로 모르셨는지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밥이 되지 않는다며 엄마한테 이것저것 물어오셨나 보다. 시간이 지나 엄마가 외할머니 댁에 찾아가서 어찌 된 영문인지 보니, 글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취사’ 버튼이 아닌 엉뚱한 버튼을 눌러서 아무리 전기밥솥 버튼을 눌러도 밥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엄마는 거실에서 그 일이 참 재미있고 엉뚱하다는 듯 연신 웃어댔다. 나는 내 방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엄마나 외할머니나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도 엄마가 컴퓨터로 이 메일을 보내려고 시도하다가 결국 ‘보내기’ 버튼을 못 눌러서 실패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외할머니 모두 서툴게, 그렇게 조금씩 무언가를 배워가고 있었다.


엄마와 외할머니에게 컴퓨터와 전기밥솥은 그 두 분과 세상을 연결하는 작은 통로이자 세상을 향한 작은 연결고리와 같았다. 사실 그 통로는 꼭 새로운 신기술, 신천지, 신세계로의 연결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지금껏 단절되어 있던 그 무언가와 나를 이어주는 이 통로를 때로는 거칠게, 서툴게, 조심스럽게 걷다 보면 그 끝에 내가 평소 바라던 그 무언가를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이 잦아질수록 내가 걷는 이 통로는 더욱 견고하게 나와 너를 연결시켜줄 것이었다. 엄마와 외할머니 모두 그 통로를 걷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오늘은 그 통로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려대학교 지하보도


몇 년 전 만해도 고려대학교 정문 앞에는 지하보도가 있었다. 고려대학교 정문 앞에는 꽤 큰 도로가 나 있었는데 그 도로를 경계로 학교 방향은 성북구 안암동이었고, 도로 너머는 동대문구 제기동이었다. 도로 하나를 두고 이쪽과 저쪽의 행정구역이 다르다는 점은 퍽 특이했는데 그 때만 해도 이 도로를 건널 수 있는 횡단보도가 없었다. 그 대신 정문에서 나와 왼쪽으로 조금 걷다보면 지하보도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계단이 있었다. 그 지하보도를 건너가면 반대쪽으로 나올 수 있었는데, 이곳은 평소에도 차가 많이 다니는 지역이고 상권이 어느 정도 있는 지역이라 학생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이라 불편한 것이 참 많았다. 시간을 다투며 바쁜 와중에 저쪽으로 넘어가야 할 일이 있는데 횡단보도가 있었다면 한 번에 바로 건너갈 수 있는 것을, 늘 계단을 걸어 지하로 내려갔다가 좁고 습한 지하보도를 지나 다시 계산을 걸어 올라와야 하는 것이 몹시 불편했다. 또 그 지하통로는 어찌나 낡았던지 군데군데 곰팡이가 슬어있었고 늘 이상한 냄새가 났다. 가끔 이상한 걸인이 거기 서서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돈을 달라고 애원하곤 했는데, 늘 100원만 달라고 해서 우리는 그 걸인을 ‘원만이 아저씨’라고 불렀다. 원만이 아저씨는 늘 100원만, 100원만 이라고 지나가는 우리에게 히히 웃으며 말을 걸었는데 어찌나 냄새가 심하던지 그 아저씨가 있는 날이면 지하통로에 좀처럼 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좋은 기억, 나쁜 기억, 별 일 없는 기억, 별 일 있는 대학 초년의 기억 모두가 섞여있는 고려대학교 지하통로는 시간이 지나 횡단보도의 등장과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분명 횡단보도가 들어선 이후에 학교에서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훨씬 쉬워졌다. 굳이 지하로 내려갈 일도 없이 잠시 신호를 기다렸다가 건너기만 하면 그만이었는데 그처럼 편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만큼 아쉬운 것도 분명 있었다. 그처럼 어둡고 때로는 불쾌했던 그 지하통로를 걸으며 이 공간을 지나면 새로운 지역으로 연결된다는 설렘과 신기함은, 낡고 오래된 벽돌로 가려져 있었기에 더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지금은 어떨까? 횡단보도에 서 있으면 반대편의 모든 것이 감추거나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내 눈에 들어온다. 쉽게 손에 잡히는 공간, 쉽게 연결되는 그 무언가는 떨림을 전해주지 못했다. 생각을 더듬어보면, 학교 앞 그 지하통로는 늘 어둡고 습했지만 그때는 그 통로만이 두 공간 사이의 유일한 연결 통로였다. 가까이 있는 듯 하지만 결코 쉽게 닿을 수 없는 곳, 고려대학교 앞 지하보도는 그 단절된 공간을 이어주는 하나의 소통 창구였던 것이다. 대개 지하통로는 '공간의 연결'에서 시작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