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태평로에 서서 각자 회사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대문 근처 신한은행 본점에 아침 일찍 볼 일이 있어 방문했다가 다시 거리로 나와보니 거리에는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대학생이었던 내게 그곳은 바쁘고 빠른 공간이었고, 그들의 그런 쉼 없는 움직임이 부럽기만 했다. 그래서 저 멀리 광화문을 바라보며 태평로 한 가운데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언젠가는 나 역시 이런 거대한 흐름에 동참해야겠다’ 는 생각을 속으로 품었다. 그 뒤로도 종종 신선한 자극을 받고 싶을 때면 서울 곳곳에 직장인들의 열기가 느껴지는 곳을 찾아 다니곤 했다. 강남역 사거리에 들어선 서초동 삼성타운의 유리벽을 바라보며, 종로 서울파이낸스센터에 입주한 외국계 기업의 면면을 바라보며 나는 꿈을 키웠고, 그 환상에 기대어 어서 대학생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SK에너지에 입사하고 나서 서린동 본사로 출근하라는 안내를 받았을 때 마음이 황망해지고 당혹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서린동은 그 전까지 내가 기억하던 숨가쁜 현대인들의 거리 - 태평로, 강남역, 테헤란로 - 의 연속선상에 있지 않았다. 서린동은 생소한 곳이었다. 오히려 서린동은 무교동-다동으로 이어지는 번잡한 동네의 연장선이었고, 근처에 청계천이 있다는 정도로 다가왔다. 그래서 함께 취업하던 친구들이 “어 난 이번에 무슨 무슨 컨설팅 회사에 들어갔는데, 강남 어딘가에 있어.” 라고 이야기할 때, 서린동은 떳떳하게 내뱉어질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부끄러움은 잘 모르는 데서 기인했다.
그렇게 시작된 서린동과의 인연이 3년으로 접어들었다. 날씨가 좋은 여름 날 퇴근을 일찍 끝내고 경향신문사 쪽으로 걸어가 정동 거리를 걷는 것도, 회사에서 가까운 부암동으로 가서 맛있는 치킨과 맥주를 먹는 것도, 시청 플라자 호텔까지 걸어가 지하 펍에서 맥주 한 잔 하는 것도 모두 일상이 되어버렸지만 그것만으로는 서린동의 전부를 말하기 어려운 것임을 안다. 서린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커피 한 잔이 필요했다. 회사에서 나와 모전교를 지나 다동으로 향하면 <우리커피연구회>에서 운영하는 빨간간판의 <<다동커피>> 가 보인다. 이 근처에도 스타벅스니, 커피빈이니, 투썸플레이스니 하는 커피 전문 프랜차이즈 가게가 많지만 <<다동커피>> 는 그것들과는 다른 한국적인 냄새가 있다. 80년대 다방을 연상케 하는 좁고 낡은 계단이나, 드립커피 대신 손흘림커피 라는 말을 쓰는 이곳의 커피는 진하기보다 구수하고 세련되기 보다 편하다. 마일드, 레귤러, 스트롱 세 가지 맛이 있지만 이곳의 스트롱은 스타벅스의 아메리카노보다도 연하고 정겨운 맛이 난다. 그 스트롱 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하여 다시 거리로 나오면 짧은 서린기행을 시작할 준비가 된 셈이다.
다동커피에서 맛있는 커피 한 잔을 준비하여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근처 청계천 광장으로 향한다. 흔히 소라기둥으로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스웨덴 출신의 미국 팝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가 설계한 스프링(Spring)이라는 작품이다. 다슬기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이 작품은 꼭 어릴 적 먹던 소라맛 쵸코빵이 생각나지만, 항상 이곳에는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관광객이 넘쳐나며 그들의 사진 찍는 모습으로 가득하다. 밤이 되고 어두워지면 은은하게 빛이 나는 이곳에서는 그 모습 때문인지 촛불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았을 것이다. 여하튼 그 조형물을 뒤로 하고 청계천으로 내려가 걷다 보면 왼편에 비로소 SK서린사옥이 가까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여름이 되어 청계천은 더욱 녹색으로 푸르고 사람은 제 각기 갈 길로 흩어진다. 모든 장소는 모든 장소 나름대로의 특색과 아름다움이 있겠으나, 서린동의 가장 큰 아름다움은 바로 이 청계천에 있었다. 아무 때나 회사 정문을 나서면 바로 청계천이 있고, 10분의 여유만 있다면 청계천 광장에서 출발해 저 종로2가 삼일교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가 있었다. 회사 근처에 일, 시간, 사람처럼 쏜살같이 흘러가는 것은 많았지만, 이 청계천처럼, 이 물처럼 가장 아름답게 그리고 유유하게 흘러가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서로의 흘러감을 견주어보고 그에 비추어 오늘의 나에 안도할 수 있다는 점은, 몇 년 전 태평로에서의 나로서는 결코 알아챌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이번 서린기행은 SK에너지 블로그에서 필진 멘토링 프로그램으로 맺어준 최선희 유스로거와 함께 했다. 멘토와 멘티라는 이름으로 만났으나 동질의 시간대를 살아가는 20대에게 서로는 그리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내가 대학생일 때 내 삶의 처음 멘토를 만났다. 그분은 삼성전자에 계신 분이었다. 그때 그 분의 나이가 스물여덟, 내가 스물 다섯이었으니 지금 나와 선희의 나이 정도 되었을 것이다. 그 분을 따라 서초동 삼성타운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더 세련된 현대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고, 그 멘토의 여러 가지 조언을 가슴 깊이 새긴 일이 있다. 우리는 함께 이것저것을 많이 같이 하며, 그 분은 내 우상이 되었고, 그 분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 이제 내가 그때의 그 멘토처럼 나이가 들고, 나도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멘티가 생겼다. 내가 서초동 삼성타운을 거닐며 꿈을 갈급해 했던 것처럼, 나도 선희에게, 나도 누군가에게 이 서린동을 걸으며 무언가를 건네줄 수 있을까. 내가 태평로에서, 강남에서 느꼈던 삶의 짜릿한 기대감을 누군가 이 서린동을 걸으며 분명 느낄 수 있겠지. 나는 그런 생각으로 청계천을 계속 걸어갔다. 나는 서린동을 가로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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