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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인사이드

[서울시 도시갤러리프로젝트 ②] 정동; 멋진 신세계, 꽃이 피다 (下)

 

 

열린 혼란의 공간 정동(貞洞), 꽃으로 피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정동제일교회를 지나 지금도 남아있는 전 세계의 외교관 건물들을 옆으로 두고 이화여고를 뒤로 한 채 정동극장과 경향신문사에 이르기까지, 종로 정동(貞洞)은 가벼운 단어로는 쉽게 말하여지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정동이라는 공간을 떠올렸을 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느냐고 물어보면 대개 비슷한 답이 나온다. 가을이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느긋하게 산책을 할 수 있고 – 이 대답에는 꼭 연인끼리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도 있다는 부연 대답이 따라온다. 아마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 예전에 가정법원이 있어서 생겨난 말일 것이다 – 연중 어느 때고 시립미술관을 찾아 조용히 미술 작품을 관람할 수도 있고, 캄캄한 밤이면 정동제일교회를 왼편으로 끼고 덕수초등학교까지 오르는 조용한 언덕길을 좋아하는 사람들까지, 정동은 바쁜 도심 속에 쉬어갈 수 있는 휴식처와도 같이 차분한 공간이다. 정동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시청에, 광화문에, 서대문에 사람과 자동차와 건물의 소요로 가득한 그 틈바구니에서 정동은 외롭게 홀로 사람들을 품고 있다.

 

그런 정동의 매력 중 하나는 다른 곳과는 달리 쉽게 말하여지지 않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는 묵직한 느낌에 있었다. 사실 시간이 흐르면서 정동에도 현대적인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매일 오후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이 엄숙하게 열리는 덕수궁 대한문을 뒤로 한 채 시립미술관에서부터 경향일보사 근처의 여러 문화시설은 과거와 비교하면 꽤 정동을 덜 아날로그적인 공간으로 바꾸어놓았고 더 많은 사람의 발걸음을 부르고 있다. 정동에서 바라본 주변의 수많은 고층 빌딩들은 이곳이 100년 전 어떤 장소였는지 쉽게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만 정동 거리를 걸어보면, 정동을 지배하고 있는 그 말 하여지지 않는 것들이 바로 「근대」의 유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학교건물이며 중등 교육기관이었던 배재학당,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정동교회, 영국 감리교 목사 윌리엄 씨가 세운 구세군 중앙회관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초에 지어진 근대 건축양식이 여전히 곳곳에 남아있다. 여전히 이 정동 거리를 걸어 다니고 있는 이화여고 학생들은 백 년 전 그때도 이 거리를 걷고 있을 것이다. 예전보다는 줄었지만, 여전히 외국 대사관들의 흔적이 있는 정동 거리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근대의 흔적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19세기 중엽 일본 동경 만에는 사람들이 지금껏 보지 못했던, 검은 연기를 내뿜는 거대한 배 4척이 나타났다. 미국 페리 선장이 이끌던 이 배는 '흑선내항'이라 불리는 일본 근대사의 일대기적 사건이었고 이어 명치유신이 시작된다. 이토 히로부미나 시바 료타로의 인물들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며 동아시아 역사는 아주 급작스러운 속도로 전근대적 사회에서 많은 것을 바꾸어야 했던, 근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으되 각 국가는 저마다 그 근대의 물결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달랐으니 그것이 곧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한 단면이다. 여전히 그 시작과 끝의 경계가 모호하며, 의의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 모던(Modern) 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본다.

 

모던(Modern)이라는 단어는 ‘바로 지금’이라는 라틴어 모도(modo)에서 나왔다. 이 단어가 처음 쓰이기 시작한 것은 5세기 무렵이었다. 그리스로마시대에서 중세로 시대가 바뀌면서 로마와 중세를 구분하기 위해 처음 쓰였던 이 말은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가리키기 위해서도 쓰였다. 그 뒤에 예술에서, 종교에서, 철학에서 종종 모던이라는 단어는 이전의 것과 지금의 것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그 바탕에는 이전 것보다 바로 지금의 것이 더 뛰어나다는 생각이 깔려있었다. 서양과 일본의 발걸음이 한껏 씩씩하게 세계로 뻗어나가던 근대에 모던이라는 단어도 분명 어제보다 오늘이 더, 아직 전근대에 머물러있는 너희보다 근대화에 성공한 내가 더 뛰어나다는 의식이 있었을 것이었고, 그게 이제 막 근대의 달콤함을 맛보려는 조선에 주어진 모던의 슬픈 단면이었다.

 

 

1900년의 개화(開化), 2000년에 다시 개화(開花)하다

 

열강의 거침없는 발걸음 속에 백 년 전 이 장소는 어떤 사람들로 붐비었을까? 이방인은 우리에게는 처음 보는 하얀 피부, 푸른 눈의 백인으로 각인될 뿐이지만, 백인으로 대표되는 생소함이 모던의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새로운 문명 속에 우리 조선의 것이 얼마나 낡은 것이었는지 깨달아버린 허탈함, 새로운 것이 꼭 좋지는 않다는 기존의 믿음, 여러 시선 속에 갈피를 못 찾는 수 많은 지식인들의 고뇌, 수 없는 감정들이 뒤 섞여 오늘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어떤 의미인지 모른 채 각자 더 깊게 침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모던 시대의 혼란과 번잡함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디자이너 하라켄야는 “도시의 매력은 혼란에 있다”라고 했으나, 모더니즘이 지배하던 백 년 전 정동은 꼭 그 혼란이 매력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혼돈 속에서도 지식인들이 끊임없이 추구 했던 일련의 모든 것들은 시간이 지나 그들이 꿈꾸었던 이상향에 대한 최소한의 시도였다. 조선 말, 봉건적인 구태의연함과 신분 질서를 벗어 던지고자 저 멀리 동학 혁명이 일어났다. 김옥균, 박영교, 박영효, 서광범…… 그 이름 만으로도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개화파의 처절한 자기반성과 모던을 향한 갈망은 나름대로의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동학은 실패했고, 김옥균은 삼일 천하 후 끝내 상하이에서 목숨을 잃는다. 잠깐 불어온 근대와, 모던과, 개화의 봄바람이 꺼진 순간 외세에 의해 그들 논리로 강요된 모던이 찾아왔다.

 




그러나 짧게나마 개화(開化)의 바람이 불었던 정동길은 신지식인들이 꿈꾸었던 '멋진 신세계'의 실험 장소였을지 모른다. 비록 짧은 순간 조선의 지식인들과 여전히 촌스러운 모던뽀이들이 꿈꾸었던 이상향을 그려내기 위해 정동은 더없이 훌륭한 열린 공간이었고, 그들은 무엇이 답인지도 제대로 몰랐지만 그 꿈을 혼란과 불안함의 이름 아래 정동에 풀어놓았다. 그렇게 풀어놓은 혼란은 이리저리 정동의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부딪치며 우리가 스스로 그려가는 모던을 염원하게 했다. 100년 전 이곳 정동은 열린 혼란의 공간이었다. 혼란스럽되 그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억지로 강요된 것이 아니었다. 이 땅의 젊은 지식인들은 스스로 그 혼란을 선택했고 최대한 자신만만하고 최소한 자유분방하게 정동 거리에 다양한 생각의 실험을 펼쳐나갔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지금, 정동길은 공공미술의 새로운 실험 장소로 또 다른 개화(開花)를 말하고 있다. 2007년 9월부터 11월까지 정동거리 곳곳에서 진행된 「정동; 멋진 신세계, 꽃이 피다」 프로젝트는 100년 전 막 고개를 들었던 개화(開化)가 꽃이 되어 현대에 다시 피어나야 함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서울시 도시갤러리프로젝트를 다양한 보통의 시선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바로 여기 정동에서부터 시작한다.

 



 

라디오 정동 (Radio Jeongdong)

 

정동제일교회가 있는 갈림길에서 이화여고를 왼쪽으로 두고 경향신문사 방향으로 걸어오다 보면 오른쪽에 정동극장이 보이는데 극장 바로 앞에 <라디오 정동>이 설치되어 있다. 라디오 정동 작품은 역사적으로 꽤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1926년 일제시대 때 이곳 정동에 경성방송국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들어섰다. 그리고 그 이듬 해 1927년 2월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방송이 전파를 타게 되는데, 현재 덕수초등학교가 그 발신지였다.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방송 송출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에 이어 세계 여섯 번째라고도 하는데, 지금은 흘러간 아날로그의 기술이 되어버린 라디오 방송이 그 당시에는 혁신적인 기술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무것도 없는 상자에서 들려 나오다니.

 



  

<라디오 정동>은 정동극장 앞에 스틸 벤치를 설치하고 의자에 앉아 있으면 벤치 내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라디오정동의 공개방송과 흘러간 유행가를 들을 수 있게 되어 있다. 2007년 처음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는 그때의 라디오 소리가 벤치를 통해 들려왔지만 지금은 스틸 벤치만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이곳을 오고 가는 사람들은 라디오 정동 벤치가 높고 낮고 재미있게 설계되어 있어서 다양한 체험을 하고 간다. 이곳에 앉아 차 한잔 마시며 쉬어가기도 하고 또 높낮이가 있는 스틸 벤치에 기대 책을 읽기도 한다. 심지어는 아빠 손을 잡은 아이의 재미있는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그 아이는 과연 알까? 자신이 밟고 지나가는 이 벤치에서 흘러나오던 라디오가 100년 전 사람들에게는 놀랍고 두려운 거대한 역사의 소리였음을, 그 차이를 쉽사리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신세계 언어 (Words from the brave modern world)

 

<라디오정동>을 지나 이화여고 쪽으로 더 올라가면 담 오른쪽에 <신세계 언어> 작품이 설치되어있다. 서구 열강들의 대사관 혹은 영사관과 같은 공관이 자리 잡았던 과거 정동 거리에는 외국인이 자주 보였다. 처음 외국인과 같은 공간에서 자리잡는다는 것은 외국인들의 수와는 상관없이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100년 전 당시 사람들은 정동 길에서 이런 사람들과 마주하면서 다른 세계를 이해하고 경험하고 멋진 신세계를 꿈꾸기도 했으나 열강의 힘겨루기로 분명 힘겨운 시간을 겪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동 거리 곳곳에서는 생소하기만 한 외국어가 자주 들려왔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정동길을 따라 LED를 설치하여, 한국어,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텍스트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게 한다. 과거 외국 열강들의 공간이었던 이곳을 서로 다른 언어로 소개하여 이 공간에 근대가 갖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백 년 전에 LED라는 기술이 후세에 등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그 시대에는 그 시대를 선도하는 최신의 지식, 기술, 문화가 결합하여 도시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사람들의 의식을 형성해 나갈 것이다. 20세기 초 정동에는 조선 최고의 신세계가 여기에 펼쳐졌다. 그리고 21세기 초 정동에는 또 다른 신세계가 이 시대를 대표하는 기술로 펼쳐지고 있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혹은 반복되지 않는가, 적어도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는 것은 늘 적지 않은 떨림을 준다.
 
밤에 찾으면 더 텍스트가 선명하고 보이는 <신세계 언어> 작품은 시간이 지나서인지 군데군데 낡은 곳이 보였지만 전반적으로 훌륭하게 보존되어 여전히 그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LED 패널은 담벼락을 타고 길게 조성되어 있었는데, 이곳을 지나는 관광객들, 특히 중국과 일본에서 온 관광객들은 매우 신기해하며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이 보였다. 

 



  

소리 꽃 (Flowers with voice)

 

<소리 꽃>은 정동극장 근처 전화 부스에 설치한 작품이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공중전화를 사람들이 통화할 때 생기는 이런저런 감정들을 단순하게 만들어 유리면에 투사시켰다. 사실 2007년에 이 프로젝트가 처음 시행될 때는 전화부스 안에 까만 옛날 전화기가 놓여있었다. 그래서 다이얼을 돌리면 추억이 되어버린 옛날 소리로 만든 현대음악이 흘러나오곤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음악작업을 담당한 작가가 “가재발” 씨였다는 점이다. 예전 바나나걸 프로젝트로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그가 공공적인 성격이 강한 서울시 도시갤러리프로젝트에도 함께 참여하여 그 완성도를 높였다는 점에서, 젊은 신진작가들이 의욕적으로 이러한 변화에 동참한다는 점이 놀라웠다.
 





2007년에 처음 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을 때 이곳에는 설치 공공작품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과 훨씬 더 많은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 많은 조형물들이 사라졌지만 서울을 공공미술의 실험장소로 바꾸어가려는 모든 참여자들의 열정은 그대로 남아있다. 또 이곳이 근대화의 중심지였던 정동길이라는 점이 더욱 의미 깊다. 현대 디자이너들이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단순히 현재라는 가치를 강조했던 것이 아니라 과거 이곳을 지배했던 근대의 재해석을 시도했던 것이 신선했고 또 한 편으로는 고마웠다.

  


멋진 신세계를 위해

 

나는 오래도록 정동 거리를 떠나지 못했다.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버린 배재학당 동관을 찾아 100년 가까이의 세월을 말해주는 붉은 벽돌의 낡은 모습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정동교회를 찾아 한 편에 마련된 아펜젤러 동상을 바라보며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처음 정동을 찾았던 여름이 지나 겨울이 되어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시립미술관 1층에서는 <이미지의 틈> 이라는 전시가 한창 선보여지고 있었다. 우리는 눈과 귀와 같은 감각을 통해 주위를 인지하고 있지만 그렇게 감각으로 받아들여지는 모습과 실재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젊은 작가들은 그 틈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서울 정동은 우리 시대가 여전히 안고 있는 전통과 새로움, 근대와 현대의 틈이었다.

 

한 때 컨템포러리(Contemporary)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고민한 적이 있다. 현대는 전통의 연속인가, 전통의 보존인가, 아니면 전통의 재해석인가에 대한 질문은 어느 하나의 사상으로만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전통은 반드시 보존되어야 하는 것인가, 오늘 날의 공간은 북촌 한옥마을처럼 전통을 이어가야 하는 것인가, 혹은 홍대 앞 놀이터처럼 현대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야 하는 것인가,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미술관처럼 공업도시로서의 전통을 벗어나 예술이라는 현대를 새롭게 창조한 것이 우리가 꿈꾸는 신세계인지, 매주 주말이면 시내 허름한 선술집에서라도 피아노를 빌려 쇼팽의 음악을 연주하는 폴란드처럼 전통을 이어나가는 것이 멋진 신세계인지, 혹은 뉴욕 첼시마켓처럼 전통과 현대의 기묘한 앙상블을 통해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답인지, 수 없는 질문들을 마주하였을 때 솔직하게 어느 것을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분명한 것은 정동 거리에서 진행된 프로젝트는 오늘 날 우리가 신세계와 멋진 미래를 꿈꾸는 과정들이 적어도 과거에서부터 시작된 일련의 흐름이 단절되지 않을 때 다시 한 번 이 공간의 의미를 되물어 볼 수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멋진 신세계를 꿈꾸고 있다. 그것도 가장 최신의 기술을 동원하여 더 밝은 미래가 있다는 생각을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그 과정에서는 반대의 목소리도 더 높아질 것이다. 100년 전 정동을 두고 개화파의 절박함이 서양 열강의 거침없는 발걸음과 일제의 야심과 조선의 또다른 지식인들의 저항에 부딪혀 다양한 혼란을 만들어냈다. 오늘 날 우리는 이 공간을 더욱 다양한 최신 공간으로 변화하려 하지만, 근대에서부터 이어져 온 정동만의 특색을 그대로 두라는 반대의 목소리에 부딪혀 다양한 혼란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100년 전의 개화(開化)가 오늘 날 단절되지 않고 다시 개화(開花)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날에도 그때와 같은 치열한 혼란이 정동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혼란이 <밀양>에서와 같이 누군가로부터 내밀려 시작된, 닫힌 혼란의 공간으로 결말지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100년의 시간을 두고 정동에서 이야기하려는 거대한 혼란의 담론은 열린 혼란의 공간으로 마무리 지어져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언젠가 그 끝없는 혼란 뒤에 신세계가 있음을 우리가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겉모습은 다르지만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 여전히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있다는 생각이 100년의 시간을 넘어 어제와 오늘의 정동이 결국 같아지게 한다.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과거를 끊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Modern이 아니라, 결국 모든 것은 동시대에 통용된다는 Contemporary를 말할 수 있게 된다. 때문에 정동을 걷고 있는 우리 모두는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누군가이며, 여전히 쉽게 말하여지지 않는 진정한 자아를 찾아 방황하는 모던보이들이다. 언젠가는 올 멋진 신세계라는 아침을 기다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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