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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복구, 과거 모습 그대로 돌아오다

숭례문 복구, 과거 모습 그대로 돌아오다

숭례문 복구, 과거 모습 그대로 돌아오다

 

지난 2013년 5월 4일에 우리의 국보 1호가 기나긴 복구기간을 거쳐 완공되는 숭례문 복구 기념식이 열린 바 있습니다. 숭례문의 복구기간은 자그마치 5년 3개월로, 화재 원인은 2008년 2월 10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한 시민의 방화로 불타버린 숭례문은 상당 부분 훼손되고 말았는데요. 불행 중 다행으로 숭례문이 모두 다 타지 않고 일부만 탔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작업을 ‘복원’이 아닌 ‘복구’로 보고 있습니다.

 

숭례문의 복구가 완료되는 데에 들인 비용은 무려 245억 원. 뿐만 아니라 복구를 위해 연인원 3만 5000명이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어마어마한 피해를 무릅쓰고 눈물겨운 완공을 이뤄낸 숭례문의 현 모습은 과연 어떨까요? 숭례문의 과거를 돌이키며 함께 살펴보도록 합시다!

 

 

숭례문의 긴 역사

 

화재로 피해를 입기 전 숭례문의 모습입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링크)


위의 사진은 화재로 피해를 입기 전 숭례문의 모습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함께한 숭례문은 6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서울을 지켜왔는데요. 길었던 시간만큼이나 숭례문에 얽힌 일 또한 많습니다. 과거로 돌아가 숭례문의 역사를 한번 알아볼까요?

 

숭례문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5년(1396)에 짓기 시작했습니다. 태조 7년(1398)에 이르러 완성됩니다.

▲출처: 1890년대, 조선국진경


숭례문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5년(1396)에 짓기 시작했습니다. 태조 7년(1398)에 이르러 완성된 숭례문은 이후 세종 29년(1447)과 성종 10년(1479), 두 차례에 걸쳐 크게 수리되는데요. 현재 가장 오래된 숭례문의 모습은 위의 사진으로 남아있습니다.

 

숭례문은 도성인 한양의 정문으로서 지니는 일상적인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링크)


19세기 말의 숭례문 일대를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이처럼 숭례문은 도성인 한양의 정문으로서 지니는 일상적인 기능을 수행했는데요. 이외에도 조선 시대 내내 기우제와 기청제를 지내는 용도로 활용되거나 백성에게 국가의 시책을 보여주는 공개적인 장소로도 활용되었습니다. 또한 임금이 직접 참관하여 반역자를 비롯한 국가적인 중죄인을 재판하고 참수 또는 효시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숭례문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 큰 변화를 겪습니다.

▲출처: 1904년, 외국잡지에 실린 모습


그러나 이후 숭례문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 큰 변화를 겪습니다. 1904년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처럼 선로가 생겨 사람, 마차, 말, 전차 등이 뒤섞여 매우 복잡한 통행로가 된 것입니다.

 

이후 일제는 성곽을 제거함으로써 통행의 편리함을 도모한다는 명분 아래 500년 동안 서울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일상을 통제하고, 조선왕조의 권력을 뜻하는 성곽을 철거했습니다.

▲출처: 1911, 일본에서 발간된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


이후 일제는 성곽을 제거함으로써 통행의 편리함을 도모한다는 명분 아래 500년 동안 서울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일상을 통제하고, 조선왕조의 권력을 뜻하는 성곽을 철거했습니다. 이 성곽철거는 1907년부터 1909년까지 2년에 걸쳐 진행되었답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숭례문에 전구를 달아 박람회장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조선박람회기념사진첩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숭례문에 전구를 달아 박람회장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사진은 각각 1929년과 1930년 당시 숭례문이 박람회장으로 사용된 모습입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숭례문은 크게 훼손됩니다.

▲출처: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링크)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숭례문은 크게 훼손됩니다. 전체 건물이 붕괴하지는 않았지만 문루 2층에 2곳, 문루 1층 중앙에 3곳 등이 훼손되어 한국전쟁 직후 긴급보수가 진행되었는데요. 수리 전과 수리 후를 1960년과 1963년의 위의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수 및 해체 수리는 1960년대까지 지속되어 모습을 점점 갖춥니다.

 

 

숭례문의 화재와 복구

 

그러던 어느 2008년 2월 10일. 설연휴의 마지막 날 숭례문 화재가 발생하여 대폭 소실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링크)


그러던 어느 2008년 2월 10일. 설연휴의 마지막 날 숭례문 화재가 발생하여 대폭 소실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600년간 꾸준히 서울을 지켜온 숭례문이 한순간의 실수로 모습을 잃은 것이죠. 그럼에도 숭례문은 여전히 국보 1호의 지위를 유지하며 5년간의 기나긴 복구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드디어 2013년 5월 4일. 숭례문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우리 곁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2013년 5월 4일. 숭례문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우리 곁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숭례문 복구 기념식이 진행된 이날은 숭례문의 복구 완료된 모습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비로소 접하게 된 숭례만 개방안내 소식이 그저 반가울 따름인데요. 기념식에는 박근혜 대통령도 참석하여 같이 축하를 해주었답니다.

 

복구된 숭례문이 소실되기 전과 달라진 점은 1954년 변형된 필체를 복원하였고, 성곽의 확장 그리고 1963년 자료에 근거하여 문양을 조선전기 형태로 바꾼 것입니다.

 

복구된 숭례문이 소실되기 전과 달라진 점은 1954년 변형된 필체를 복원하였고, 성곽의 확장 그리고 1963년 자료에 근거하여 문양을 조선전기 형태로 바꾼 것입니다. 또한 기와를 공장에서 만들지 않고 전통가마에서 직접 구워 사용했습니다.

 

한편 주목할 점은 숭례문의 현판이 세로인 점입니다.

 

한편 주목할 점은 숭례문의 현판이 세로인 점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불의 산(火山)'이라 일컬어지는 서울 남쪽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현판을 통해 맞불을 놓은 것이랍니다.

 

 

과거와 현재를 지나 미래를 잇는 우리 대한민국의 국보 1호 숭례문! 다시 훼손되지 않도록 우리 국민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주말을 이용하여 새로 복구된 숭례문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상 SK에너지 유스로거 정지석 이었습니다.

 

유스로거 정지석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