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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인사이드

석유왕이라 불리운 사나이

석유왕 이야기

 

여러분은 ‘석유왕’이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아마 미국 역사나 석유와 관련된 책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많이 접해봤을 단어라고 생각하는데요. 석유왕과 함께 철강왕, 철도왕, 금융왕, 자동차왕 등 각종 '왕 시리즈'는 그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 금융왕 J. P. 모건 등이 우리 귀에 익숙한 이름들인데요. 석유왕 역시 석유를 통해 업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을 일컫는 명예로운 호칭입니다.

 

석유공장에서 근로자가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석유왕이라고 불리는 사람에는 누가 있을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록펠러라는 이름이 나올 것입니다. 1881년 미국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95%를 손에 쥐고 있을 정도로 석유 산업의 1인자였던 록펠러는 '석유왕'이라는 단어가 거의 고유 명사처럼 쓰일 정도로 유명한데요. 록펠러와 함께 석유왕이라고 불리는 자가 또 있습니다.

 

바로 게티박물관으로 유명한 진 폴 게티입니다. 그 역시 석유사업을 통해 석유왕이라는 칭호를 받는 대단한 인물입니다. 뛰어난 경영전략과 자기계발, 그리고 자선사업으로 이름을 날린 석유왕 존 D. 록펠러와 진 폴 게티. 유스로거가 지금부터 석유왕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존 D.  록펠러 (John Davison Rockfeller, 1839 ~ 1937)

 

록펠러 이미지입니다.

▲ 출처: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링크)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1839년 뉴욕 리치포드에서 태어났습니다. 록펠러의 집안은 특별히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미국의 평범한 가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수입 감소와 법적 분쟁으로 집안의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졌고, 이 시기를 보내며 록펠러는 많은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록펠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헤이트 앤 터틀이라는 종합 도매상 회사에 입사하며 첫 직장을 가집니다. 당시는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시기였지만 록펠러는 직접 회사 사장을 여러번 찾아갈 정도로 집념을 보이며 취직에 성공했습니다.

 

회계 장부 이미지입니다.

 

록펠러는 이 시기부터 회계장부를 꼼꼼하게 기입하기 시작합니다. 록펠러는 매일같이 모든 항목을 꼼꼼하게 기입해 나갔고, 철저하게 기록된 장부를 통해 효율적인 금전 관리와 절약 정신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이는 많은 이들이 록펠러의 성공 비결 중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의자에 앉아 악수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1859년 '클라크 앤 록펠러'라는 회사를 창업하며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당시 석유가 산업 시설과 운송 기관의 중요한 연료로 떠오르는 분위기를 감지한 그는 정유 회사인 ‘앤드류스, 클라크 주식회사’를 설립하며 사업을 확장시켜 나갑니다.

 

스탠더드 석유회사 로고입니다.<스탠더드 석유회사 로고>

 

그러다 마침내 1870년에 독자적으로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설립하며 석유왕으로의 본격적인 도약을 시작합니다. 1882년에는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 조직을 결성하였고 1885년엔 오하이오 리마 부근에서 엄청난 유전을 개발하여 커다란 부를 얻게 됩니다.

 

두손으로 하트 모양의 사물을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록펠러의 사업 방식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양면으로 갈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록펠러가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이유는 막대한 금액을 사회에 환원하면서 나눔의 삶을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근 100년 동안 돈을 벌었고, 평생 모은 재산을 사회에 기부했습니다.

 

시카고 대학 이미지입니다.<시카고 대학 전경 이미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록펠러는 50살이 넘어가는 시기부터 자선사업을 시작합니다. 1889년에 시카고 대학에 60만 달러를 기부하였고, 록펠러 재단을 설립해서 각종 자선활동과 교육사업을 실시하며 사회 기부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록펠러 재단은 아직도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자선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록펠러는 1937년 98세의 일기로 사망합니다. 록펠러가 사망한 날 전 세계의 스탠더드 오일 계열사에서는 5분간 일손을 놓고 20세기 회고의 석유왕을 추모했다고 합니다. 록펠러는 석유로 세상을 움직인 인물입니다. 그가 보여준 자기 관리의 모습과 사회 나눔 활동은 우리가 충분히 본받을 점이라 생각합니다.

 


진 폴 게티 (Jean Poul Getty, 1892 ~ 1976)

 

진 폴 게티 이미지입니다.

▲ 출처: 위키백과(링크)

 

진 폴 게티는1892년  미국 미니애폴리스 주 미네소타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조지 게티는 법률가 출신으로 유전 사업을 시작해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폴 게티의 아버지는 아들의 독립심을 키우기 위해 폴 게티에게 일정량의 용돈만을 주었고, 투자금을 빌려주고 원금을 회수하는 등 경제적인 관념을 확실히 심어주었습니다.

 

1913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그는 본격적으로 석유사업을 시작합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도 어릴 때부터 길러 온 천부적인 사업 수완으로 석유 판매량과 유전 개발에 주력했고, 오래지 않아 100만 달러가 넘는 큰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게티 회사의 로고 이미지입니다.<게티 오일사 로고>

 

1920년대에 들어 그는 아버지와 공동으로 게티오일사를 설립했습니다. 회사는 폴 게티의 능력하에 승승장구했으나 커다란 시련을 맞게 됩니다. 그 상대는 앞에서 다루었던 석유왕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악수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1928년 폴 게티는 캘리포니아 주에 큰 유전을 확보했으나 스탠더드 오일이 경쟁에 뛰어들면서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경쟁사를 합병하면서 규모를 확장했던 스탠더드 오일에 맞서기 위해 폴 게티가 취한 전략은 스탠더드 오일과 마찬가지로 기업합병이었습니다.

 

매머드 급의 상대와 싸우려면 자기 자신도 매머드급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폴 게티는 여러 석유 회사를 인수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덩치가 커진 게티 오일사는 스탠더드 오일의 도전을 막아내고 성공적으로 회사를 확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폴 게티의 결단력이 그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1950년대에는 미국 포춘지에서 세계 1위의 부호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합니다.

 

폴 게티 미술관 전경 이미지입니다.

▲ 출처: 위키백과(링크)

 

폴 게티는 자신이 쌓은 부를 예술 작품을 통해 사회에 환원했는데요. 미술품 수집을 좋아했던 그는 수억 달러 가치의 미술품들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1953년 로스엔젤레스에 '게티미술관'을 개관하면서 시민들에게 무료관람을 허용했고, 미술관 직원들의 급여를 바지로 충당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사회공헌을 실천합니다.

 

1976년에 세상을 떠난 폴 게티는 록펠러에 이은 제2의 석유왕으로 불리며 성공적인 경영인으로 평가받는데요. 그가 남긴 '성공의 6원칙'은 아직도 후대의 많은 경영인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폴게티 ‘성공의 6원칙’
1. 당신 자신을 위한 사업을 가져야 합니다.
2. 수요가 큰 상품이나 용역이 반드시 보장되어야 합니다.
3. 취급하는 상품이나 용역이 반드시 보장되어야 합니다.
4. 타 경쟁 대상보다는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합니다.
5. 당신의 일을 해 주는 사람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 주어야 합니다.
6. 다른 사람의 성공을 발판 삼아 당신의 성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석유왕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긍정과 비판의 양면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두 인물이지만, 그들이 석유를 향해 흘렸던 땀방울과 사회공헌의 정신은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자극이 될 수 있는 소중한 가치인 것 같습니다.

 

유스로거 이상경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