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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인사이드

[서울시 도시갤러리프로젝트 ⑩] 청운공원; 인왕산에서 굴러 온 바위(下)

가치를 발견하며 서울시 도시갤러리프로젝트 청운공원 인왕산에서 굴러 온 바위 하

 


싱가포르의 그 밤은 호롱 등이 밝았다


2010년 8월 7일은 토요일이었다. 무덥고 습했던 그날 오후, 나는 종로 자하문고개를 지나 아기자기한 카페들로 가득한 자하문 사거리에 들어섰다. 


청운동, 부암동은 여전히 사람의 오랜 멋이 남아있는 공간이다. 저 멀리 몇십 년은 이 자리에 계속 있었을법한 세탁소나 단독주택들이 자리 잡고 있는 전경을 마주한 채, 도로 한 편에 나 있는 좁은 인도를 따라 왼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간간이 비가 내렸던 날이라 길섶 주변의 풀들은 색이 파랬고 평소보다 그 무게가 더해져 저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시멘트로 계단을 만들어 놓은 가파른 오르막길을 지나니 통의동과 효자동 골목이 한눈에 보였다. 지대가 높은 곳이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라고 팻말이 서 있는 곳은 종로 청운동의 청운공원이었고 곳곳의 나무 기둥마다 그의 시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등에는 땀이 습하게 배었다. 어깨로 이고 있는 무겁고 습한 것을 버리려면 비가 내려야 했으나 쉬이 내려놓지도 못하고 툭 버리지도 못해 습했던 날이었다. 그날은 절기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날이었다. 입추(立秋)였다. 

 

몇 년 전이었다면 8월 초 날씨는 이처럼 습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더운 것은 마찬가지이나 언젠가부터 열대야라는 말이 뉴스를 통해 심심치 않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밤에만 그런 것은 아니어서 이제는 낮에도 살갗으로 전해지는 습도가 꽤 높고, 가끔 소나기가 급하게 쥐었다 폈다 지나간 자리는 눅눅함이 가득했다. 눅눅하다는 것은 여전히 버려야 할 습기가 많이 남아있다는 것을 말했다. 


비슷한 느낌이 분명 예전에도 있었다. 이 년 전 나는 싱가포르에서 반년 정도 공부할 일이 있었다. 한여름으로 접어들던 유월의 서울 밤은 더웠으나 아직 불쾌하지 않았다. 


여섯 시간의 비행 후 그 이튿날 새벽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도착해 택시를 부르려고 공항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습기가 온몸에 달라붙었다. 목 깊숙한 곳까지 더운 공기로 가득 찼고 숨 쉴 때마다 내 몸이 질퍽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날씨는 그 해 12월 크리스마스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거리에서는 트리 장식도 하고 여기저기 광고 문구도 만들어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옴을 알렸지만, 사람들은 모두 시원한 반소매 옷차림으로 여전히 더위를 쫓는 그 모습이 어려웠다. 


꼭 그때와 같지는 않으나 서울도 점점 날씨가 변하고 있었다. 부암동 끝 자락을 내려다보며 나는 싱가포르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말레이시아 반도 끝에 있었지만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나라, 싱가포르도 가을이 되면 추석을 명절로 삼아 큰 축제를 연다, 이른바 Moon Festival이라는 것이다. 


중국 치파오와 비슷하게 생긴 싱가포르 전통 의상을 입고 춤을 추기도 하고 월병같이 생긴 음식을 함께 빚어 먹는 행사도 하는데 특히 함께 공부하던 미국과 유럽인들의 반응이 좋았다. 그들 나라에도 제가 끔의 축제는 있을 테지만, 아시아라는 곳에서 이국의 정서를 느낀다는 것은 더욱 독특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 축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Moon Festival 축제 마지막 날 밤이었다. 싱가포르 현지 학생들을 보니 저마다 작은 호롱 등을 들고 밤이 되길 기다려 큰 광장으로 모인다. 


준비성이 있는 친구들은 학교 근처 가게에서 호롱을 사오기도 했지만 어떤 아이들은 종이컵에 촛불을 끼워 실로 매달아 대충 들고 나오기도 한다. 그도 없으면 대충 손으로 큰 촛불을 들고 나오다. 각각의 모양은 아무래도 좋다. 저마다 가지고 나온 것에 크고 작은 불을 켜서 큰 광장에 모이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윽고 준비해 온 호롱을 한 장소에 모은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이 들고 온 호롱을 한군데에 모으니 그 모습이 제법 볼 만하다. 


그리고는 각자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비는 것인데 내 또래의 젊은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소원을 비는 모습이 결코 쉽지 않았다. 서양에서 온 키 큰 친구들은 더욱 모습이 어설프다. 성당에서 손을 맞잡고 기도하는 모습은 익숙하나 합장하듯 손바닥을 포개고 다른 이들 눈치를 살피며 소원을 비는 모습이 제법 반갑다. 

 

 

저마다 소원을 빌고 나면 우리는 호롱 등을 들고 다시 학교를 한 바퀴 돈다. 일렬로 나란히 서서 도로를 질주하며 이제부터는 엄숙한 의식도 없고, 신성한 마음가짐도 없다. 즐거운 축제만이 남는다. 


저마다의 바람은 제가끔 다를 것이나 그 염원하는 마음의 무게만큼은 같을 것이며, 그 정성은 비단 한, 두 해 이어져 온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입으로 손으로 전해져 온 그들만의 공동의식이었다. 


처음에는 정해진 호롱만을 엄격하게 규정해 온 이 행사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며 조금씩 그 모양이 변해갔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은 공동체가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점이었고, 이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러나 영원히 완성될 수가 없는 집단 예술의 한 장면이었다. 


싱가포르의 그 밤은 호롱 등이 무척 밝았다.

 


인왕산에서 바위가 굴러왔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고개에 올라 작게 나 있는 길을 따라 내려가니 바로 앞에 정자가 하나 있었다. 왼쪽에는 철골구조에 작은 돌멩이가 잔뜩 쌓아져 올린 구조물이 보였다. 서낭당에 치성을 올리며 사람들이 돌 하나에 염을 담듯 저마다의 돌멩이가 저마다의 사연으로 포개어져 있다. 


서울시 도시갤러리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추진된 <인왕산에서 굴러 온 바위>는 원래 경복궁 고궁박물관 뜰 내에 있었다. 철골 구조물로 원형을 만들어 그 사이 사이에 돌을 쌓아 올렸다. 그 조형물 가운데에는 원래 LCD 화면이 있었는데 시민이 서울에 대해 사진이나 UCC를 찍어 온라인 사이트에 올리면 그 화면을 통해 해당 콘텐츠가 재생되는 공공예술작품이었다. 


의도가 신선했다. 사람들이 저마다 갖고 있는 서울에 대한 기억과 앞으로의 염원을 작은 돌에 담아 한 장소에 모은다는 것이었다. 서낭당에서 볼 법한 가장 전통적인 방법과 철골 구조라는 가장 현대적인 방법을 적절히 섞어 공공의 기억을 모은다는 작가의 아이디어가 그 의미를 곱씹어 볼만했다.


좋은 예술은 평론가의 어려운 단어가 아니라 대중들에게 직관적이고 쉽게 다가올 때 비로소 대중의 품으로 뛰어든다. 대중성의 결여가 예술의 질을 평가하는 중요한 이유가 될 수는 없으나, 예술이 보다 평범하고 더욱 다양한 대중의 영역에 투사될 때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 시민이 하나의 멋진 주체로 저마다 예술가로서 참여할 수 있었다.

 

2008년 겨울 <인왕산에서 굴러 온 바위>는 현재 자리인 종로 청운공원으로 옮겼는데 지금은 일부가 생략되었으나 공공의 기억을 한데 모아 사람과 예술 사이에 소통 공간을 만들려는 원래의 취지는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작품의 이름처럼 인왕산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공간으로 돌아온 것도 예술작품의 인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오늘 이 비 오는 청운공원을 찾은 것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만난 지인 대여섯이 동행하였는데 그중에는 예술에 대해 뜻이 있는 이도 있었고, 이름난 부암동 카페에 관심을 두는 이도 있었고, 할 일이 없어 연락을 받고 급히 나온 이도 있었다.


그 이유야 어떠하든 우리는 이 도시갤러리프로젝트의 자발적인 참여자가 되기 위해 이 바위 앞에 모인 것이었다. 단지 조형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종래에 완성된 제품만이 미의 상징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람들의 의지와 생각을 합치는 행위야말로 비로소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공공예술의 본질이기도 했다.

 

 

그 모습은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는 있으나 우리는 청운공원을 돌며 작은 돌멩이를 줍기 시작했다. 이 공공예술작품에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그 과정에 동참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은 결코 경망스럽지 않았다. 


누가 쌓아 올린 것인지도 모를 수천 개의 돌 조각들 위에 각자 주워온 돌멩이를 얹으며 어떤 이는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기도 했고 저마다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또, 어떤 이는 별 관심 없다는 듯 대충 돌 조각을 올려두고는 다른 사람들을 지켜보며 멀찌감치 물러나 있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보았다. 싱가포르에서 보았던 수백 개의 호롱들이 여기서는 수천 개의 돌멩이가 되어 사람들의 기억과 염원을 담아두고 있음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 무더운 싱가포르의 여름밤, 호롱 등을 들고 거리를 걸으며 빌었던 소원이 그 후에 실제 이루어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조차 이미 잊어버렸다. 


인왕산에서 굴러 온 바위가 사람들의 소원을 언제 들어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오후 들어 내리기 시작한 비가 이 조형작품 위에 내리면서 가벼이 떠 있던 그 염원들을 단단하게 돌 조각에 매어줄 것이었다. 서울은 날이 습했고 비가 오후 내내 왔다. 

 


예술의 완성은 언제 이루어질까


서울시가 도시 속에 공공예술작품을 전시하고 여러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의도했던 것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시민으로 하여금 예술적인 심상을 환기하고 나아가 서울이라는 공간이 예술적으로 얼마나 변화하고 있는지 알리려는 데에 있었다. 다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공공예술의 목적이지만, 그것이 단지 멀리서 보고 즐기는 것에서 그친다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기기 어려울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끝에 있는 결과만이 아닌 중간 과정의 공유였고, 공공예술은 결국 끊임없는 우리 모두의 참여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정이라는 것은 어느 한 점이 아닌 길고 긴 선이었기 때문에 어느 한 시점에서 완성될 수가 없다. 


우리는 무지개를 ‘빨주노초파남보’라고 이해하고 있지만, 정말 그 색과 색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잡아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무지개라고 부르는 것은 단편적인 색과 색의 합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색의 파장들이 만들어내는 전체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눈에 보였다. 


공공예술에  정해진 도착지와 정해진 모습은 없다. 다만 끊임없이 움직이고 바뀌고 변화하는 다수의 몸짓과 열정이 있었을 뿐이다. 


집단은 개인이 느낄 수 없는, 함께하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그 아름다움은 원시적이고 정제되어 있지 않지만,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낮은 감정들을 더 손쉽게 전달해준다. 

 

 

종로 청운공원 가운데에 인왕산에서 굴러 온 바위가 놓여 있다. 공공의 기억을 되살리고 각자의 희망을 담아 함께 공유하려는 바위이다. 소수의 예술가에 의해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여전히 수많은 시민의 손길을 통해 조금씩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바위이다. 


그러나 아직 이 작품은 완성되지 않았으며 어쩌면 시간이 지나도 결코 완성되지 못할 것이다. 이 작품은 캔버스 위에 한 번 그려놓고 수백 년의 시간 동안 늘 찬사를 받는 유화와는 다를 것이다. 


이 바위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거칠고 부드러운 붓 놀림이 묻어있다. 그 위에 또 다른 마음이 얹어지고 또 다른 생각이 더해지며 이 작품은 더욱 무거워지고 더욱 넓어진다. 


한 아름으로 안을 수 없는 이 작품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바로 예술가다. 물론 그들 스스로는 본인이 예술을 했다고 거창하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예술을 창작하는 과정에 동참하고, 그 동참하는 자체가 예술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것을 공공예술의 완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예술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인왕산에서 굴러 온 바위는 사람들이 돌을 얹을 때마다 오늘도 조금씩 자라고 있다. 아주 조금씩 우리들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게, 오늘도 조금씩 자라고 있다. 



황정운 에너지정책팀